분류 전체보기67 랭스로 되돌아가다 (계급 수치심, 정체성, 노동계급 우경화) 계급을 '탈출'했다고 느끼는 순간, 왜 더 불편해지는 걸까요? 저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설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말을 고르고, 화제를 고르고, 심지어 웃는 방식까지 다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그 불편함이 단순한 적응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개인 안에 새겨놓은 감정의 흔적이라는 걸 정면으로 파고드는 책입니다.계급 수치심은 개인의 약점이 아닙니다프랑스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미셸 푸코의 전기 작가로 더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퀴어 이론(Queer Theory) 분야에서도 손꼽히는 학자죠. 퀴어 이론이란 성 정체성과 젠더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에서 권력 구조를 분석하는 학문입니다. 에리봉은 자신의 게이 정체성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공개적으로 발화하고 이론화해 왔.. 2026. 4. 12. 눈과 보이지 않는 (자유, 연대, 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오랫동안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곧 '잘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마감을 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고, 또 다음 성과를 쌓는 것. 그 루틴 안에서 제가 달리는 이유를 물어보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데이브 에거스의 『눈과 보이지 않는』을 읽으면서 그 질문이 불쑥 돌아왔습니다.290쪽짜리 동화가 던지는 자유의 질문이 책은 그림책이라는 분류가 무색하게 290쪽에 달하는 이야기 소설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원에서 사는 개 요한네스입니다. 요한네스는 공원의 '눈(The Eyes)'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눈'이란 공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원로 들소 세 마리에게 보고하는 정찰자 역할을 의미합니다. 요한네스는 빛보다도 빠르다고 주장하며, 주변 동물들이 그.. 2026. 4. 11.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외모지상주의, 열등감, 존재가치) 학교 다닐 때 솔직히 외모 얘기가 얼마나 잔인하게 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성적도, 성격도 아닌 딱 얼굴 하나로 사람을 정리하는 분위기. 저도 그 안에서 '그냥 보통'인 얼굴이 왜 이렇게 불안한지 오래 이유를 몰랐습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다시 꺼내 읽으면서 그 불안의 구조가 개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확인했습니다.외모지상주의가 만드는 열등감의 구조이 소설은 1985년, 재수생인 '나'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어느 날 느닷없이 사라집니다. 배우로 성공하면서 가족을 지우기로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잘생긴 외모로 주목받았고, 그 외모가 결국 가족을 배신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이 "아름다움은 배신의 언어"라고 느끼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제가 처음 이 설정을.. 2026. 4. 10. 에리히 프롬 (바이오필리아, 자기애, 무력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이기심이라는 믿음, 이게 얼마나 오래된 착각인지 프롬을 읽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에리히 프롬의 사후 유작을 묶은 선집으로, 생전의 주요 저작에서 보기 어려웠던 날 선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기심과 자기애를 혼동해온 우리의 오래된 습관, 그리고 현대인이 빠진 무력감의 구조를 정면으로 다룬 책입니다.이기심과 자기애, 반대말이 아니었다일반적으로 자신을 아끼면 타인을 등한시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 욕구를 앞세우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관계 안에서 먼저 맞추고 나중에 지치는 패턴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프롬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전.. 2026. 4. 9. 투명한 빨간 무 (환각적 리얼리즘, 결핍의 미학, 인간 존엄) 책을 읽다가 한 장면에서 완전히 멈춰버린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모옌의 「투명한 빨간 무」를 읽다가 딱 그런 순간을 맞았습니다. 굶주린 아이가 낡은 대장간에서 무 하나를 바라보는데, 그게 금빛으로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이야기 한가운데 갑자기 아름다움이 쏟아지는 느낌이랄까요.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환각적 리얼리즘이 담아낸 1960년대 중국의 결핍2012년 스웨덴 한림원은 모옌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면서 "환각적 리얼리즘(hallucinatory realism)을 민간 구전문학과 역사에 잘 결합시켰다"고 평했습니다. 여기서 환각적 리얼리즘이란 현실의 참혹한 사실을 그대로 그리면서도, 그 위에 환상적·초현실적 이미지를 겹쳐 인간의 내면을 더.. 2026. 4. 8. 프랑켄슈타인 (창조 책임, 피조물 소외, AI 윤리)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수십 년 동안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봤던 초록빛 얼굴, 목에 박힌 나사, 어그적거리며 걷는 거대한 괴물. 그게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을 들여다보니,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창조자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단순한 사실 하나가 책 전체의 무게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피조물의 소외, 누가 진짜 괴물인가피조물은 처음부터 악하지 않았습니다. 이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괴물'을 제대로 정의하고 있었을까요?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피조물은 드 라세 가족의 오두막 창고에 숨어 지내며 그들을 몰래 도왔습니다. 나무 틈으로 가족의 일상을 지켜보.. 2026. 4. 7. 이전 1 2 3 4 5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