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사가 끝나면 사람들은 정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드라마 '홈타운'을 다 보고 나서 한동안 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드라마를 장르 스릴러로만 접근했는데, 직접 보고 나니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건을 잊으려 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무서운 드라마였습니다.
공포의 근원: 기억이 만드는 집단 트라우마
'홈타운'의 배경이 되는 사주역 가스 테러 사건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입니다. 87년 추석 연휴 전날, 붐비던 기차역에 신경 작용제가 살포되어 2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설정입니다. 여기서 신경 작용제(nerve agent)란 인체 신경계의 화학적 신호 전달을 교란하여 근육 마비와 호흡 정지를 유발하는 독성 화학 물질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사린이나 VX 같은 물질이 대표적인데, 드라마는 이 과학적 공포를 직접 보여주기보다 그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먼저 몸으로 느낀 건 그 공기였습니다. 사건은 분명히 87년에 끝났는데, 드라마 안의 모든 인물들은 여전히 그날의 반경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형사 최형인은 매 장면마다 무언가를 버티는 사람처럼 보였고, 조재영은 아버지가 테러범이라는 사실 하나로 평생을 이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부릅니다. PTSD란 생명을 위협하는 충격적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이후 수개월에서 수년 뒤까지도 반복적인 회상, 과각성, 감정 마비 등의 증상이 지속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국내에서도 재난 피해자들의 PTSD 유병률이 일반 인구 대비 유의미하게 높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드라마는 이 개념을 교과서처럼 나열하지 않고, 카세트테이프를 듣는 순간 멍해지는 인물들, 어떤 소리에 갑자기 굳어버리는 장면들로 육체적으로 표현해냅니다.
제가 특히 소름 돋았던 건 '믹스 테이프'라는 장치였습니다. 학생들이 친구에게 건네주던 평범한 음악 모음집이, 알고 보면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최면 암시가 담긴 도구였다는 반전. 그 설정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는 콘텐츠가 어떻게 무의식을 건드리는지 새삼 생각하게 됐습니다.
홈타운이 공포를 만드는 방식에서 핵심적인 특징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자연적 존재가 아닌 사회 구조의 빈틈과 방치된 피해자들이 공포의 원천
- 테이프, 비디오, 카메라 등 '기록 매체'가 세뇌와 조작의 도구로 사용됨
-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이 같은 공간에 뒤엉켜 살아가는 구도
- 개인의 기억 조작이 집단 차원의 재난으로 확장되는 플롯 구조
사이비 종교와 망각: 국가가 방치한 자리를 채우는 것들
드라마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지점이 바로 영진교 서사입니다. 영진교는 사주역 테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든 종교 집단인데, '구루'라 불리는 인물이 이들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조직을 키워왔습니다.
저는 이 설정을 보면서 "왜 사람들은 이런 집단에 끌리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드라마 속 신도들이 아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나 사회가 제때 책임지지 않은 자리에 구루가 먼저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 손을 잡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원합니다"라는 대사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었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지적 종결 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인지적 종결 욕구란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참지 못하고 어떤 형태로든 명확한 답을 원하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재난이나 대형 사건 이후 피해자들이 이 욕구가 극도로 높아진 상태에서 명확한 서사와 귀속감을 제공하는 집단에 취약해진다는 점은 여러 사회심리학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제가 드라마를 보며 가장 뼈아프게 공감한 대사는 "고통을 망각으로 덮어버리는 대신 그 고통을 연료 삼아 누군가를 지배하는 인간이 있다"는 흐름이었습니다. 구루가 신도들에게 제공한 건 위로가 아니라, 고통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서사 안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화의 날이라는 집단적 극단 행동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역사 속 실제 사이비 집단들의 메커니즘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습니다.
다만 솔직히 아쉬운 지점도 있었습니다. 회상 장면과 인터뷰 형식이 반복되면서 중반부에 긴장의 밀도가 흐트러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몇몇 인물은 그 안에서 충분히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상징의 역할로만 소모되는 것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던지는 핵심 질문만큼은 계속 유효했습니다. 참사 이후 사회가 피해자에게 제대로 응답하지 않으면, 그 침묵의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반드시 채운다는 것.
'홈타운'은 귀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가와 사회가 사건을 '마무리됐다'고 선언하는 순간, 실제 피해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직접 보고 나서 며칠이 지났는데도 저는 특정 장면들이 자꾸 머릿속에 되살아났습니다. 그게 이 드라마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그냥 무섭고 끝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를 찾고 계신다면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단,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