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7 박사가 사랑한 수식 (우애수, 정수론, 돌봄의 언어) 매일 아침 할 일 목록을 만들고, 중요한 약속은 알림을 이중으로 설정하고, 그래도 놓칠까 봐 포스트잇을 붙여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오직 80분만 유지되는 사람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수학 소설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기 쉽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그 안에는 숫자보다 훨씬 더 따뜻한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우애수(友愛數)가 말해주는 것 — 숫자로 관계를 읽는 법일반적으로 수학은 차갑고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적표, 연봉 협상, 성과 지표. 숫자는 대부분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줄 세우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설을 접하고 나서 그 믿음이 꽤 편협한 것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 2026. 4. 18. 눈먼 자들의 도시 (문명의 취약성, 백색 실명, 인간 연대) 정보가 많을수록 세상이 더 잘 보인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세상을 '본다'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전염처럼 퍼지는 '백색 실명'이라는 설정 하나가, 기술 뉴스 수백 편보다 훨씬 선명하게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습니다.문명의 취약성 — 가면이 얼마나 얇은지AI와 반도체 관련 글을 쓰던 시절, 저는 늘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정보가 쌓일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공허해지는 역설이 찾아왔습니다. 그 공허함 속에서 손에 잡힌 것이 『눈먼 자들의 도시』였고, 읽는 내내 이상한 현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2026. 4. 17.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 (경력단절, 유용함의 감각, 노동의 존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청소 업계의 실전 에피소드가 가득할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펼쳐보니 이건 청소 이야기가 아니라, 오십이 넘은 여자가 자기 안의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에 관한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의 이야기와 겹쳤습니다.경력단절과 그림자 노동, 사라진 이름들제가 직접 주변을 돌아보니, 이 이야기가 특별한 사람의 것이 아니더군요.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이름이 희미해지는 경험,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겁니다.경력단절(Career Break)이란 취업 상태에 있던 사람이 결혼·임신·육아·가족 돌봄 등의 이유로 노동 시장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 2026. 4. 16. 이라영 쇳돌 (노동기록, 산재, 기록윤리)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노동'이라는 단어를 몸이 아닌 머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 몸이 닳는 것 사이의 거리를 실감한 건, 제 주변의 생계가 보이지 않는 위험 위에 세워져 있다는 걸 가까이서 보게 된 뒤였습니다. 안전모를 쓰고도 불안해 보이던 눈빛, 퇴근 후에도 풀리지 않는 통증, 사고 소식이 돌 때마다 짧게 오는 침묵. 그 기억이 『쇳돌』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사라지는 노동: 광산 현장과 산재의 실체일반적으로 광산업은 이미 지난 산업, 역사 속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재 국내에는 300여 개의 광산이 여전히 가동 중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은 60년 전과 구조적으로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쇳돌』은 강원도 양양군.. 2026. 4. 15. 자기 신뢰 (자기점검, 비동조, 성찰) 솔직히 저는 꽤 오랫동안 "남들 하는 대로만 가면 최소한 망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을 신념처럼 붙들고 살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점수가 안전망이었고, 사회에서는 트렌드가 판단 기준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라 '남들이 승인해 준 삶'을 살고 있다는 감각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읽은 에머슨의 『자기 신뢰』는 단순한 자기계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불편하게 찌르는 철학이었습니다.자기점검 없는 자기 신뢰는 독단이다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19세기 미국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대표하는 사상가입니다. 여기서 초월주의란 인간 내면에 신성한 직관이 존재하며, 그 직관을 따르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조입니다. 에머슨은 목사직을 스스로 그.. 2026. 4. 14. 고요한 읽기 (광학 기구, 자기 성찰, 집중 독서) 솔직히 저는 한동안 독서를 정보 수집 도구로만 썼습니다. 빨리 읽고, 핵심만 뽑아내면 뭔가 나아질 거라고 믿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읽은 책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승우 작가의 『고요한 읽기』는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주는 책입니다. 독서의 목적지가 세계가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여정에 집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요.광학 기구로서의 책, 그게 무슨 의미인가이승우 작가는 책을 '광학 기구(optical instrument)'라는 표현으로 정의합니다. 광학 기구란 렌즈나 거울처럼 빛을 굴절·반사시켜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책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건, 책을 통해 우리가 평소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 2026. 4. 13. 이전 1 2 3 4 ··· 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