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한국 드라마 시장은 장르물의 대홍수를 맞이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시간 여행(타임슬립)과 세계관의 멸망을 다룬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은 언제나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지난 2021년 JTBC에서 창사 10주년 특별기획으로 방영되었던 조승우, 박신혜 주연의 드라마 <시지프스 : the myth>입니다.
이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천재 과학자와 미래에서 온 전사의 만남, 그리고 핵전쟁으로 무너진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스케일로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산꼭대기로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의 이름을 딴 만큼, 작품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운명과 그 속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의 나약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조명합니다. 총 16부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초반 서사와 함께,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후회'라는 감정이 어떻게 장르적으로 발현되었는지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천재 과학자 한태술과 미래에서 온 구원자 강서해
이야기의 중심에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천재 공학자이자 글로벌 기업 '퀀텀앤타임'의 회장인 한태술(조승우 분)이 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고분자 화합물을 양자 전송을 통해 이동시키는 분자 전송 실험에 성공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내면은 깊은 트라우마로 부서져 있는 인물입니다. 몇 년 전, 자신에게 끊임없이 의문의 경고를 남기던 형 한태산(허준석 분)을 미친 사람 취급하며 차갑게 밀쳐냈던 그날 밤, 형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형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갇힌 태술은 매일 환영을 보며 약으로 버티는 위태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술이 탑승한 비행기가 상공에서 정체불명의 물체와 충돌하며 추락하는 미증유의 위기가 발생합니다. 태술은 기발한 과학적 재치와 기지를 발휘해 비행기를 구사일생으로 착륙시키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지만, 이 사고를 계기로 믿을 수 없는 음모와 마주하게 됩니다. 비행기와 충돌한 것은 새가 아니라 상공에 떠 있던 '슈트케이스'였고, 그 안에는 죽은 형의 물품과 함께 미래의 사진들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시각, 폐허가 된 미래에서 정착 확률이 1%도 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다운로드'를 감행해 현재의 대한민국에 도착한 여전사 강서해(박신혜 분)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과거로 건너온 목적은 단 하나, 바로 한태술을 지키는 것입니다. 미래의 서해는 북한의 남침과 핵공격으로 인해 서울이 순식간에 재더미로 변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재앙의 시발점이 다름 아닌 한태술이 발명하게 될 시간 이동 기계, '업로더'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서해는 태술을 노리는 의문의 세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궁극적으로는 업로더의 발명을 막아 예정된 전쟁을 저지하려 합니다.
베일을 벗는 단속국과 브로커, 그리고 절대 악 '시그마'
태술과 서해가 만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현재의 세계에는 미래에서 불법으로 밀입국하는 인간들을 체포하고 통제하는 의문의 정부 기관 '단속국'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미래에서 넘어온 이들이 현재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철저히 감시하며, 태술과 서해의 숨통을 조여옵니다. 반면, 이들의 눈을 피해 미래인들에게 정착 서비스를 제공하며 이득을 취하는 불법 브로커 '박사장(성동일 분)'과 같은 회색지대의 인물들도 등장하여 극의 긴장감과 입체감을 더합니다.
박사장을 통해 태술은 미래인들이 현재로 넘어오는 메커니즘인 '다운로드'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신체의 조각들이 마치 데이터처럼 양자 전송되어 조립되는 이 기괴한 기술은, 훗날 자신이 만들게 될 시스템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형 태산의 유골함에 있던 DNA가 형의 것이 아니었으며, 형이 여전히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단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단속국의 끈질긴 추격과 드론을 이용한 미친 듯한 공세를 피해 다니며 서서히 거대한 배후에 다가갑니다. 그 중심에는 모든 사건을 뒤에서 조종하는 절대 악 '시그마'가 존재합니다. 시그마는 단순한 관망자가 아니라, 퀀텀앤타임의 초기 투자자로서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태술의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태술이 전적으로 신뢰하던 회사 이사장과 주변 인물들까지도 시그마와 얽혀있음이 드러나며, 태술은 세상 전체가 자신을 속이고 거대한 연극을 벌이고 있었다는 깊은 배신감과 독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부산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의 저격 위기를 기점으로, 두 사람은 이제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도망자가 아니라 운명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는 사투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인간은 왜 그토록 지독한 후회의 사슬에 묶여 있는가 (개인적 성찰)
드라마 <시지프스>가 던지는 화두 중에서 가장 가슴을 찌릿하게 유도하는 대목은, 미래의 사람들이 왜 목숨을 잃을 확률이 90%가 넘는 위험을 무릅쓰고 과거로 돌아오느냐에 대한 대답입니다. 극 중 인물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과거로 돌아오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후회 때문'이라고 말이죠. 나중에 가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라는 괴로움에 매일 밤을 지새우다가 결국 과거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는 것입니다.
이 대사는 제 개인적인 삶의 궤적과 슬픈 기억들을 강하게 자극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돈이나 명예를 다 주어도 바꾸고 싶은 타임머신 속 단 한 순간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저에게는 몇 년 전 너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와의 이별이 그러한 응어리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취업 준비와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에 치여 바쁘다는 핑계로, 늘 걸려오던 할머니의 전화를 귀찮아하거나 무뚝뚝하게 대하기 일쑤였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따뜻하게 계실 줄 알았던 할머니가 어느 날 새벽 심장마비로 허망하게 곁을 떠나셨을 때, 제 세상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그때 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까", "왜 주말에 잠깐 시간 내서 찾아뵙지 않았을까" 하는 처절한 후회였습니다. 극 중 미래인이 과거로 돌아와 이미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어머니를 붙잡고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 내가 많이 사랑해"라고 울부짖는 장면은 마치 제 내면의 죄책감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듯해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한태술이 형의 경고를 무시했던 기억을 평생의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가듯,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내린 선택의 업보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드라마는 역설합니다.
신선한 상상력과 서사적 개연성 사이의 아쉬운 균형 (비평)
작품성을 냉정하게 짚어보자면, <시지프스>는 한국 드라마 지형에서 보기 드문 본격 SF 미스터리 액션 장르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과감한 시도이자 격려를 받을 만한 작품입니다. 초반부 비행기 추락 신에서 보여준 조승우의 매끄러운 연기와 과학적 설정을 접목한 전개, 그리고 디스토피아적 미래와 현재를 오가는 웅장한 세계관은 SF 마니아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극이 전개될수록 화려한 상상력과 설정의 무게를 촘촘한 서사가 감당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시간 여행물에서 가장 정교해야 할 '인과관계의 법칙'과 '개연성'이 다소 허술하게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단속국과의 추격전이나 대규모 액션 신에서 극적 카타르시스를 위해 주인공들에게 과도한 '버프'가 부여됩니다. 사방에서 수십 발의 총알이 난사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만 마법처럼 총알을 비껴가거나, 맨몸으로 중무장한 전문 요원들을 제압하는 장면들은 극의 현실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몰입도를 저해하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시각적인 볼거리에 치중하느라 서사의 논리적 설득력이 희생된 꼴입니다.
또한, 거대한 배후인 시그마라는 조직이 왜 굳이 한태술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도 살려두어 업로더를 만들게 유도하는지에 대한 플롯의 설명이 다소 모호하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인물들의 분투와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은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세계관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전개는 시청자들에게 후반부로 갈수록 짜릿함보다는 피로감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굴레의 구조가 서사 자체의 극적 발전을 막는 독으로 작용한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의 숭고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찬가
비록 서사적인 결함과 개연성의 아쉬움은 존재할지언정, <시지프스 : the myth>가 장르라는 외피를 입고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만큼은 묵직한 울림을 남깁니다. 드라마는 멸망해버린 디스토피아 미래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미래를 바꾸는 방법은,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현재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조승우와 박신혜라는 걸출한 두 배우는 미묘한 감정의 균열과 고난도 액션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서사의 구멍을 훌륭하게 메워주었습니다. 끝없는 후회의 굴레 속에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운명일지라도, 서로를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손을 맞잡는 두 주인공의 사투는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촘촘하고 완벽한 서사를 원하시는 분들께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으나, 신선한 한국형 SF의 시도와 함께 '현재'라는 시간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한 번쯤 진지하게 정주행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