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 볼 때 그냥 막장 정치물이겠거니 하고 틀었습니다. 그런데 방태섭이 자신의 아내를 감시하기 위해 스탠딩 배우를 심어 넣는 장면에서 멈칫했습니다.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하게 되는 건 결국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역설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이미지 권력이 개인을 집어삼키는 방식
이 드라마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건 '이미지 권력'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이미지 권력이란 실제 능력이나 진실과 무관하게 대중이 인식하는 평판 자체가 권력의 원천이 되는 구조를 뜻합니다. 정치인도, 배우도, 검사도 결국 이 이미지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고 유지하느냐에 따라 생존이 결정됩니다.
추상아가 탈세 의혹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보면 이 구조가 얼마나 잔인하게 작동하는지 보입니다. 사실 관계가 아니라 프레이밍(framing), 즉 사건을 어떤 맥락으로 포장하느냐에 따라 여론이 완전히 반전됩니다. 프레이밍이란 동일한 정보라도 어떤 관점으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수용자의 해석이 달라지는 커뮤니케이션 기법입니다. 이양미가 미디어를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프레이밍 능력 때문이었고, 방태섭이 그 구조를 역이용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제가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사실 박재상의 폭로 방송이 아니라 그 방송을 소비하는 댓글 장면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추락이 실시간 콘텐츠가 되는 그 순간, 저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타인의 스캔들을 소비해온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됐습니다.
공범 구조가 만들어지는 심리적 메커니즘
방태섭과 추상아가 서로의 공범이 되는 과정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심리적으로 정교한 부분입니다. 두 사람 모두 처음부터 악인이 아닙니다. 방태섭은 부패한 검찰 조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협을 선택했고, 추상아는 한지수의 죽음과 오광재라는 괴물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이 심리적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도덕적 이탈(moral disengagement)이라고 부릅니다. 도덕적 이탈이란 자신의 행동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양한 자기합리화 기제를 통해 죄책감을 희석시키는 심리 현상입니다. 방태섭이 오광재 사건을 덮으면서 "권세명 회장이라 위에서 찍어 누르는데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바로 이 도덕적 이탈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자기합리화는 한 번 시작되면 점점 더 큰 타협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드라마 안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에는 거래였다가 나중에는 진짜 감정으로 뒤섞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공범 관계는 단순한 이해관계를 넘어 서로의 취약점을 공유하는 가장 강력한 결속 형태가 됩니다.
공범 구조가 형성되는 주요 단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첫 번째 타협: 생존을 위한 작은 묵인에서 출발
- 취약점 공유: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관계가 고착
- 상호 의존: 한쪽이 흔들리면 다른 쪽도 무너지는 구조 형성
- 도덕적 이탈 심화: 타협의 누적으로 죄책감 감각이 마비
시스템 부패와 개인 윤리의 경계
이 드라마가 단순한 악인 대 선인 구도를 피할 수 있었던 건 시스템 자체의 부패를 전면에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방태섭이 검사가 된 건 복수를 위해서였지만, 그 조직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진골" 서열 구조에 편입되거나 도태되는 선택지만 남습니다. 이건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조직 문화와 구조의 문제입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조적 폭력이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자체가 불평등과 피해를 만들어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검찰, 재벌, 정치, 연예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여 있는 이 드라마의 세계관은 구조적 폭력의 작동 방식을 꽤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반복되는 배경에는 이런 구조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의 부패인식도 조사에 따르면 공공기관 내부의 비리 신고자 중 상당수가 오히려 불이익을 경험한다고 응답했습니다(출처: 국민권익위원회). 방태섭이 정직 처분을 받고 "이 썩어 빠진 조직 제가 나갑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단순한 통쾌함을 넘어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시스템을 거스른 대가는 결국 개인이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를 보며 제가 직접 떠올린 건, 직장에서 분위기상 묵인했던 작은 부조리들이었습니다. 대단한 비리가 아니어도 "여기선 다 이렇게 해"라는 말 앞에서 침묵했던 순간들, 그게 이 드라마가 말하는 구조적 폭력의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황정원이라는 인물이 던지는 질문
황정원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자라다 어머니를 잃고, 범죄와 약물로 생존해온 사람. 그런데 이 인물이 추상아를 동경하며 살아왔고, 결국 그녀를 지키려다 세상을 떠납니다.
황정원의 서사는 드라마에서 레질리언스(resilience) 개념을 역설적으로 건드립니다. 레질리언스란 극심한 역경 속에서도 정신적으로 회복하고 적응해나가는 능력을 말합니다. 황정원은 어떤 의미에서 레질리언스를 가진 인물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 회복력이 시스템의 부패 속에서 끝내 소진됩니다. 한국트라우마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복합 외상을 경험한 개인은 성인이 된 후에도 관계 형성과 신뢰 구축에 구조적인 어려움을 겪는다고 밝혀져 있습니다(출처: 국가트라우마센터).
제가 이 인물에서 오래 머문 건, 황정원이 죽기 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USB에 담아 방태섭에게 남겼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복수도 아니고, 폭로도 아닌, 진실을 전달하는 행위. 가장 더럽게 살았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던 사람이 결국 가장 깔끔한 선택을 했다는 아이러니가 오래 남았습니다.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저는 결국 악은 거창한 악인이 아니라 "지금 당장 안전한 선택"의 누적에서 탄생한다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방태섭도, 추상아도, 이양미도, 모두 어느 한 순간의 선택이 쌓인 결과물입니다. 드라마가 끝난 자리에서 남는 건 "나는 어떤 타협 앞에서 멈출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거창한 정의가 아니라 오늘 하루의 작은 유혹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 그게 이 드라마가 결국 독자에게 넘기는 숙제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