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노동'이라는 단어를 몸이 아닌 머리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 몸이 닳는 것 사이의 거리를 실감한 건, 제 주변의 생계가 보이지 않는 위험 위에 세워져 있다는 걸 가까이서 보게 된 뒤였습니다. 안전모를 쓰고도 불안해 보이던 눈빛, 퇴근 후에도 풀리지 않는 통증, 사고 소식이 돌 때마다 짧게 오는 침묵. 그 기억이 『쇳돌』이라는 책을 접하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라지는 노동: 광산 현장과 산재의 실체
일반적으로 광산업은 이미 지난 산업, 역사 속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현재 국내에는 300여 개의 광산이 여전히 가동 중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은 60년 전과 구조적으로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쇳돌』은 강원도 양양군에 있던 양 광업소를 중심으로, 3대에 걸친 100년의 노동사를 추적한 책입니다. 저자의 고모는 사범학교를 졸업했음에도 선광부로 일했습니다. 여기서 선광부란 채굴된 광석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유용한 광물을 골라내는 작업을 맡은 노동자를 뜻합니다. 흔히 광부라고 하면 남성 갱내 노동자만 떠올리기 쉬운데, 1960년대 광업소에는 수백 명의 여성 선광부들이 존재했습니다. 저자 스스로도 고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고정관념이 실제 역사를 가렸던 셈입니다. 저 역시 비슷한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장을 가까이서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 현장을 이루는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산재(産災), 즉 산업재해의 실태는 더 무겁습니다. 1970년대 석탄광에서는 한 해에만 230~250명이 사망했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낙반 사고란 갱내 천장이나 벽면이 무너지면서 작업자를 덮치는 사고를 말합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갓 스물의 나이에 이 사고로 동료가 훼손된 채 죽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시신 수습은 동료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고 들어가야만 가능했고, 회사는 그 예외적인 음주를 묵인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는 당시 회사 보고서에 그 장면이 어떤 숫자로 기록됐을지 생각했습니다. 아마 '사고 1건, 처리 완료' 정도였겠지요.
폐광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진폐증과 난청 같은 직업병에 시달렸습니다. 진폐증이란 광물 분진을 장기간 흡입했을 때 폐 조직이 섬유화되는 질환으로, 치료보다 진행을 늦추는 것이 목표인 만성 질환입니다. 그런데 현재 법적으로 광산업 관련 직업병으로 인정받는 것은 진폐증과 난청뿐입니다. 위장 질환, 관절 손상 같이 노동자들에게 훨씬 흔하게 나타나는 질병들은 직접적인 인과관계 증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보상에서 제외됩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연구에서도 트라우마가 치아나 위장 문제로 나타난다는 결과가 있었지만, 이런 간접적 연관성은 의학적으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출처: 한국트라우마연구교육협회). 결국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고스란히 피해자 개인에게 넘어가는 구조입니다.
핵심적으로 책이 드러내는 산재 문제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사고는 뉴스가 되지만 사후 보상은 회사의 회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직업병은 인과관계 증명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어, 싸우지 않으면 보상받지 못합니다
- 사망 사고에 분노한 노동자가 해고 위기에 처하는 반면, 책임 주체는 끝내 흐릿해집니다
기록윤리: 노동의 목소리를 번역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노동 관련 논픽션은 현장 고발이나 감동적인 증언록으로 읽히기 쉽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쇳돌』 관련 내용을 살펴보니, 이 책이 다른 이유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저자는 세 가지 방식을 동원했습니다. 첫째는 자기 문화 기술지(autoethnography)입니다. 자기 문화 기술지란 연구자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저자 본인과 가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됩니다. 둘째는 구술 생애사로, 양 광업소를 떠난 사람들을 직접 추적해 인터뷰한 결과물입니다. 셋째는 문화 비평으로, 광부와 광산을 다룬 시, 소설, 그림 등 예술 작품을 분석해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운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복원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특히 공감한 부분은 가족사를 활자화하는 것의 폭력성에 대한 고민입니다.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순간, 독자는 감동을 얻지만 당사자는 다시 대상화됩니다. 저자는 이 경계 위에서 문학 작품을 끌어와 특수한 경험에 보편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그 시도가 단순한 고발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번역에 가깝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 저는 불편한 질문도 떠올렸습니다. 결국 이 책을 읽는 주된 층이 지식인과 중산층이라면, 기록은 또 다른 소비가 될 수 있습니다. 노동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과 "대표하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와 권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저자 스스로도 이 한계를 인식하고, 노동자들이 단순한 문화 소비자가 아니라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가 어떻게 묻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밝힙니다. 중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지만 독학으로 엄청난 독서량을 쌓은 광산 노동자의 사례가 책에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동자는 기록되는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알고 있는 주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노조와 광산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분리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연좌제란 특정인의 정치적 활동이 가족에게도 불이익을 주는 제도로, 한국에서는 1980년대까지 신원 조회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의 분리 욕망이 단순한 계층 이동 욕구가 아니라, 이 연좌제 피해 경험에서 비롯된 생존 전략이었다는 대목에서 저는 한동안 멈춰 앉아 있었습니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부모의 두려움 뒤에 얼마나 깊은 이유가 있었는지, 그걸 건조하게 기록한 저자의 태도가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쇳돌』이 던지는 질문은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막장이라는 말은 광산의 막다른 갱도 끝을 뜻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사회가 책임을 회피할 때마다 현재형으로 다시 발명된다고 말합니다. AI나 자동화가 들어와도 이 구조는 끝나지 않습니다. 위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위험을 떠안는 사람이 더 약한 쪽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배달 노동자, 학교 급식실 노동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 없이 현장을 채우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핵심입니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감동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음 막장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쇳돌』을 읽기 전에 한 번, 읽고 나서 한 번, 지금 내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이 책이 독자에게 요청하는 최소한의 몫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