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처음엔 발자크를 천재 작가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재능'보다 '버티는 체력'이 인생을 밀어붙인다는 감각을 다시 배웠습니다. 유모에게 맡겨지고 기숙학교로 내던져진 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그 결핍을 에너지로 바꿔 하루 16~18시간씩 글을 쓰고 사업을 벌이고 망하고 빚을 지고 다시 쓰는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제가 승인 글을 수십 편 쓰는 동안 '이게 맞나' 싶어도 결국 또 키보드 앞에 앉는 이유와 묘하게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증적 추진력과 끝없는 낭비
발자크는 심리학적으로 조증(躁症, Mania) 상태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서 조증이란 기분이 과도하게 들뜨고 충동적인 행동이 반복되는 정신 상태를 의미하는데, 단순히 '기분 좋음'이 아니라 판단력 저하와 낭비벽을 동반합니다(출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가장 극적인 예시가 시계 매장 에피소드입니다. 빨간 시계 하나를 보자마자 시승도 하지 않고 "이거 주세요"라고 말하고, 옆에 하나 더 있으니 두 대를 사서 집으로 가는데 면허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게 조증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패턴은 일시적 만족을 주지만 재정적으로는 파국을 부릅니다. 발자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원고료가 많이 들어와도 금방 없어졌고, 화려한 마차와 지팡이, 골동품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지만 대부분 가짜거나 과대평가된 물건들이었습니다. 귀족들은 그를 비웃었고, 그는 자신이 천박하게 보인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저는 불편했습니다. 우리가 "예술가의 열정"이라는 말로 이런 자기 파괴적 행동을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발자크의 작업량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작가 중 그만한 양을 쓴 사람은 없었습니다. 장편만 91편, 여기에 가명으로 쓴 연애소설, 법전, 희곡, 단편까지 합치면 몇백 권에 이릅니다(출처: 한국문학번역원). 그는 조수를 고용해 자신이 잠든 6시간 동안 소설을 이어 쓰게 하려 했지만,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결국 혼자 써야 했고, 그 과정에서 빚은 계속 늘어났습니다.
인정 욕구와 귀족 흉내
발자크는 원래 '오노레 발자크'였지만, 어느 순간 자기 이름에 '드(de)'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는 프랑스에서 귀족만 붙일 수 있는 접두사입니다. 쉽게 말해 자격도 없는데 귀족 행세를 한 것입니다. 세상은 당연히 비웃었지만, 발자크는 끝까지 '오노레 드 발자크'로 불리길 원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허영이 아니라,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결핍이 귀족 신분이라는 외부 인정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믿었던 심리적 보상 기제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현대인의 인정 욕구를 봅니다. SNS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해 과소비하고, 명품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행동 패턴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발자크는 화려한 지팡이를 주문하고, 엄청난 돈을 들여 골동품을 샀지만, 귀족들은 그가 사기당한 가짜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 만든 욕망의 착취 구조입니다.
발자크의 인정 욕구는 사랑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평생 엄마뻘 되는 여성들과만 연애했습니다. 처음엔 옆집 친구 엄마, 그다음엔 자신을 보살펴주고 빚을 갚아주는 귀족 부인들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모성 결핍의 투사'라고 부릅니다. 결국 그는 폴란드 귀족 한스카 부인에게 평생 매달렸고, 그녀의 남편이 죽기를 7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남편이 죽고도 몇 년 후에야 결혼할 수 있었지만, 그때 발자크는 이미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려하게 꾸며놓은 파리의 집을 보지도 못한 채 누워 있었고, 아내는 쇼핑을 다니며 남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발자크는 혼자 죽었습니다.
사실주의 문학의 시작, 인간 희극
발자크는 문학사에서 '사실주의(Realism)'의 창시자로 평가받습니다. 여기서 사실주의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되, 특히 돈과 계급, 사회 구조를 적나라하게 다루는 문학 사조를 의미합니다. 그 이전 작가들은 궁정 귀족의 로맨틱한 사랑을 주로 그렸지만, 발자크는 달랐습니다. "자, 이제 계산을 해보자. 상속을 받으면 1년에 얼마 벌고, 얼마를 내고, 여기서 이런 사업을 하면 얼마가 남는다." 이런 식으로 돈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제 경험상 독자들은 돈 얘기에 가장 몰입합니다. 현실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은 이상하게 돈 얘기 쓰기를 싫어하지만, 발자크는 평생 빚에 시달렸기에 돈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숙집 주인, 푸줏간 주인, 고리대금업자, 사업가, 성직자 등 프랑스 사회 전 계층을 망라합니다. 그의 야망은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이라는 프로젝트로 구체화됐습니다. 프랑스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 유형을 그리겠다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목표였습니다.
발자크가 처음 발견한 작가가 스탕달입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은 당시 겨우 22부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발자크는 이 작품을 보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추천 글을 썼습니다. 문학계에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작가를 발자크가 먼저 알아본 것입니다. 스탕달은 너무 놀라 발자크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발자크는 "당연하다. 너는 정말 대단한 작가고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실제로 발자크의 예언은 맞았습니다. 발자크가 죽을 때 관을 든 사람 중 유일한 진정한 친구가 빅토르 위고였고, 위고는 발자크의 조문을 명문으로 남겼습니다.
재능을 몰랐던 천재의 역설
발자크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자신의 재능을 끝까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글쓰기를 '잠시 밥벌이'로 생각했고, 빨리 돈을 벌어 사업을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신문사를 차렸다가 처절하게 망했고, 출판사를 차렸다가 또 망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아이디어들은 모두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실현해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세계명작 전집'이라는 개념도 발자크가 처음 제안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한 권도 안 사는데 50권 100권을 누가 사겠느냐"며 비웃었습니다. 발자크는 돈을 끌어들이고 종이를 사고 전집을 냈다가 파산했고, 그 출판사를 이어받은 사람은 나중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천재는 자기 재능을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발자크는 몰랐습니다. 그는 작가로서는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발자크 평전에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바 주인으로 앞치마를 걸치고 있어도 어울렸고, 얼굴이 후줄한 농부여도 어울렸지만, 작가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 역설이 발자크의 본질입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를 '먼치킨 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본인만 모르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 말입니다. 요즘 웹소설에서 유행하는 클리셰이기도 한데, 발자크는 이미 19세기에 그 원형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해(self-awareness)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자기가 뛰어난 줄 모르면 그 재능은 제대로 발휘되지 않습니다.
발자크는 자기 삶을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소설가로서 인생의 중요한 과제는 자기의 다양한 자아를 통합하는 것인데, 발자크는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고, 끝까지 귀족이 되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자신을 타인처럼 느끼는 이유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택배 상자를 열고 "이게 뭐지? 누가 시킨 거지?" 하다가 사흘 전 내가 시킨 걸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나를 타인으로 느낍니다. 발자크는 평생 이 통합에 실패했고, 그래서 더 비극적입니다.
발자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성과"라는 말로 모든 고통을 정당화하는 습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천재적 작업량과 아이디어로 후대의 존경을 얻었지만, 그 과정은 빚과 과로, 인정 욕망, 신분 상승 집착, 관계의 결핍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서사를 '위대한 예술가의 숙명'처럼 소비하지만, 사실 그건 한 인간의 삶이 시스템적으로 갈아 넣어진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조증적 추진력은 멋있게 포장되기 쉽지만, 실제로는 가족과 본인을 동시에 파괴하는 위험 신호입니다. 저는 여기서 AI 시대의 글쓰기와 노동을 함께 떠올립니다. 생산성 도구가 늘수록 사람은 더 많이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더 빨리 소진됩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썼냐'가 아니라 '어떤 속도로, 어떤 대가로, 무엇을 남겼냐'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발자크의 비극은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재능과 욕망을 스스로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끝까지 끌려갔다는 데 있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는 그 함정을 더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