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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우애수, 정수론, 돌봄의 언어)

by haramsolution 2026. 4. 18.

매일 아침 할 일 목록을 만들고, 중요한 약속은 알림을 이중으로 설정하고, 그래도 놓칠까 봐 포스트잇을 붙여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기억이 오직 80분만 유지되는 사람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수학 소설이라는 말에 지레 겁먹기 쉽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그 안에는 숫자보다 훨씬 더 따뜻한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박사가 사랑한 수식

우애수(友愛數)가 말해주는 것 — 숫자로 관계를 읽는 법

일반적으로 수학은 차갑고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적표, 연봉 협상, 성과 지표. 숫자는 대부분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줄 세우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소설을 접하고 나서 그 믿음이 꽤 편협한 것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소설의 핵심 장면 중 하나는 수학 박사가 가사도우미의 생일 숫자 220과 자신의 시계 뒷면에 새겨진 284를 연결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우애수(友愛數, amicable numbers)입니다. 우애수란 두 수가 서로 상대방의 약수의 합과 같아지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220의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를 모두 더하면 284가 되고, 반대로 284의 약수를 모두 더하면 다시 220이 됩니다. 두 수가 서로를 가리키며 순환하는 구조입니다.

박사는 이 숫자 쌍을 두고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인연"이라고 말합니다. 페르마와 데카르트도 각각 단 한 쌍씩밖에 발견하지 못했을 만큼 희귀한 수라는 설명과 함께요. 저는 이 대목에서 꽤 오래 멈췄습니다. 최근 몇 년간 AI, 반도체, 생산성 최적화 같은 주제로만 글을 써왔는데, 정작 '이 사람과 내가 왜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박사가 다루는 수학의 세부 분야는 정수론(整數論, number theory)입니다. 정수론이란 자연수와 정수의 성질을 탐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로, 소수(素數)의 분포, 약수 관계, 수들 사이의 특별한 패턴을 연구합니다. 현대 암호학의 근간이 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설 속 박사에게 정수론은 세상을 암호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실을 찾아내는 방법입니다.

수학 교육 연구에서도 이런 접근 방식의 효과는 검증된 바 있습니다. 수학적 개념을 인간 관계와 감정에 연결해 가르칠 때 학습자의 개념 이해와 정서적 몰입이 동시에 높아진다는 결과가 보고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수학교육학회). 박사가 틀린 답에서도 칭찬거리를 찾아내고, 아이의 머리 모양에서 루트(√) 기호를 떠올려 별명을 붙여주는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가르치는 행위 자체가 돌봄의 형태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 소설에서 수학이 특별한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숫자가 평가 도구가 아니라 관계를 이어붙이는 언어로 쓰입니다
  • 틀린 계산 안에서도 직감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칭찬이 작동합니다
  • 완전수(完全數), 우애수, 소수 같은 수의 성질이 사람의 성격과 관계를 묘사하는 은유가 됩니다

오일러의 공식과 돌봄의 언어 — AI 시대에 우리가 잃고 있는 것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수학 공식 하나가 말싸움을 멈추는 대목입니다. 형수와 가사도우미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박사는 말 대신 메모지에 수식 하나를 써서 식탁 한가운데 밀어 놓습니다. e의 iπ승 + 1 = 0. 바로 오일러의 공식(Euler's formula)입니다.

오일러의 공식이란 수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식으로 꼽히는 식으로, 자연상수 e, 허수 단위 i, 원주율 π, 그리고 1과 0이라는 다섯 가지 근본적인 수가 하나의 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리수와 허수(虛數, imaginary number)가 더해져 결국 0이라는 완전한 정지에 도달하는 구조입니다. 허수란 제곱하면 음수가 되는 수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수학 체계 안에서는 필수적인 개념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금 불편했습니다. 아름다움이 갈등을 해결한다기보다 잠재운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형수(미망인)의 날 선 태도는 단순한 악의가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 돌봄의 부담,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인 결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설은 그 복잡함을 끝까지 해명하기보다 여백으로 남깁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여백을 문학적 미덕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여백이 때로는 현실의 불평등을 미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지금 시대에 유독 유효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억이 80분밖에 유지되지 않는 박사는 매일 아침 재킷에 꽂힌 메모지로 자신의 상황을 다시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제가 스마트폰 알림과 메모 앱 없이는 오늘 일정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설정이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현대인의 조건을 압축한 것처럼 읽힙니다.

인지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작업 기억(working memory)은 한 번에 평균 7개 내외의 정보만 처리할 수 있으며, 정보 과부하 상태에서는 감정 조절과 타인 배려 능력이 유의미하게 저하된다고 합니다(출처: 한국뇌연구원). 작업 기억이란 현재 진행 중인 사고와 행동을 일시적으로 보관하고 처리하는 기억 체계를 뜻합니다. AI가 더 많은 정보를 더 빠르게 처리해주는 시대일수록, 정작 우리의 뇌는 관계를 처리하는 여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사는 기억이 짧아질수록 오히려 매 순간에 더 충실합니다. 루트의 작은 발견에 진심으로 놀라고, 생일 숫자 하나에서 인연을 찾아냅니다. 저는 그동안 '대단한 기술'을 설명하는 데는 공을 들이면서, '사람을 살리는 다정함'을 기록하는 데는 소홀했다는 걸 이 소설을 접하고 나서야 인정하게 됐습니다.

수학이 돌봄의 언어가 될 수 있다면, AI 시대에 우리가 정말 연습해야 할 것은 더 많은 계산 능력이 아니라 반복해도 지치지 않는 관심과 다정함일지 모릅니다.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그 연습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권유하는 소설입니다. 기술보다 관계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요즘, 한 번쯤 꺼내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lHrYXdJ3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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