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허균이 400년 뒤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다는 설정, 처음엔 그냥 가벼운 코미디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낯선 시대에 던져졌을 때 사람은 무엇으로 버티는가"라는 질문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음식과 노동으로 계급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습니다.

낯선 세계에서 음식으로 살아남는 법
제가 드라마 초반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허균이 호패 대신 볼펜을 잡는 장면이었습니다. 신분증 하나 없으면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현실, 이게 조선이 아니라 지금 이야기라는 게 묘하게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감각은 꽤 보편적입니다. 익숙한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환경에 들어가면, 설명할 언어도 사라지고, 결국 "내가 누구인가"보다 "증명할 수 있는가"가 전부가 되는 상황 말입니다.
허균이 백반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장면들은 이 드라마의 핵심 서사 장치입니다. 여기서 서사 장치란 이야기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소재나 상황을 말합니다. 그는 붕어찜 조리법을 설명하고, 두부를 손수 만들고, 방풍죽을 끓입니다. 방풍죽이란 방풍나물 싹으로 끓인 전통 죽으로, 드라마 안에서 거부반응 없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 미솔에게 처음으로 통한 음식으로 등장합니다. 음식이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인물 간 관계를 복원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음식과 정서적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도 익숙한 맛이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출처: 한국식품과학회). 허균이 은실 엄마의 손맛을 그대로 재현해 낼 때 은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이 심리적 메커니즘을 드라마적으로 풀어낸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 지쳐 있을 때 누군가의 밥 한 끼로 다시 살아난 기억이 있는데, 그 장면에서 그게 겹쳤습니다.
신분제 비판이 현대극으로 읽히는 이유
이 드라마에서 가장 날카로운 대사는 은실이 허균에게 던지는 한 문장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 양반이고 돈 많은 사람이 왕이에요." 허균이 꿈꾸던 율도국, 즉 귀천 없이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이상향이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율도국이란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가상의 이상 국가로, 평등과 풍요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드라마는 이 율도국을 400년 뒤 서울에 투영했다가, 결국 스스로 부수는 방식으로 현대 계층 구조를 비판합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 이게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신분제(身分制)는 법적으로 철폐됐지만, 자본과 정보 접근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위계가 그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신분제란 사회 구성원을 태어난 신분에 따라 권리와 역할을 고정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드라마 속 이역 셰프가 백반집을 차지하기 위해 CCTV를 조작하고, 경찰을 매수하고, 언론 플레이를 동원하는 과정은 이 현대판 위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드라마가 이 지점을 특히 잘 포착한 것은, 자본의 논리를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도시재생 이론으로 포장했다는 점입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주변 전체가 쇠퇴한다는 범죄학 이론으로,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제안한 개념입니다. 드라마에서 이 이론은 오래된 백반집을 '슬럼화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논리적 근거로 사용됩니다. 저는 이 설정이 현실에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과 정확히 겹친다고 느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낙후된 지역이 개발되면서 기존 거주자나 상인들이 밀려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허균의 친구들인 강변칠서(江邊七庶)의 이야기도 이 맥락에서 읽혔습니다. 강변칠서란 조선 중기 서자 출신 문인 일곱 명을 가리키는 역사적 용어로, 신분의 벽에 막혀 재능을 쓰지 못했던 인물들입니다. 드라마는 이들이 이이첨의 정치적 음모에 희생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능력보다 배경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구조의 잔인함을 함께 그립니다.
허식당이 현대극으로서 설득력을 갖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상과 현실의 충돌을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음식과 노동의 언어로 풀어낸 점
- 신분제 비판이 조선 시대 설정에 머물지 않고 현대 자본 권력의 작동 방식으로 이어지는 점
- 악인의 논리가 나름의 언어와 근거를 갖추고 있어 단순 선악 구도를 피한 점
불공정한 세상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
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허균이 이이첨의 제안을 두 번 거절하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조선에서, 두 번째는 현대에서. 둘 다 "지금 나가면 친우들을 구할 수 있고 당신도 살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번 인륜을 저버리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단칼에 잘라냅니다. 이 선택이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은 건, 드라마가 그 선택의 대가를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허균은 결국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면하지 못합니다. 능지처참이란 죄인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는 조선 시대 극형으로, 역모죄에 적용되었습니다.
저는 이 결말이 희망적 메시지를 억지로 끼워 넣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신뢰가 갔습니다. 정해진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는 설정 안에서도, 허균이 남긴 것은 홍길동전이라는 서사와 밥 짓는 손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400년을 건너 은실의 백반집 간판에 새겨진 이름으로 남는 구조는, 무겁지 않게 전달되면서도 꽤 오래 머물렀습니다.
실제로 역사적 기록에서 허균은 1618년 인조반정 이전 광해군 시대에 역모 혐의로 처형된 인물로,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드라마는 이 역사적 비극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가 꿈꿨던 세계를 현대 공간에서 시험해 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습니다.
제 경험상, 사회 구조 비판과 인간적 감동을 동시에 잡으려는 드라마들이 가장 자주 실패하는 지점은 갈등 해소를 너무 쉽게 처리할 때입니다. 허식당도 후반부 일부 전개에서 오해와 우연이 연달아 터지며 설득력이 흔들리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끝내 붙잡는 질문은 선명합니다. "공정한 세상이 어떻게 가능하냐"가 아니라, "불공정이 일상인 세상에서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최소한의 품위는 무엇이냐"입니다.
그 답을 드라마는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문을 여는 마음, 밥 짓는 손, 이름 하나를 간판에 새기는 일.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식당이 궁금하신 분은 현재 넷플릭스, 티빙 등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