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오랫동안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곧 '잘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마감을 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고, 또 다음 성과를 쌓는 것. 그 루틴 안에서 제가 달리는 이유를 물어보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데이브 에거스의 『눈과 보이지 않는』을 읽으면서 그 질문이 불쑥 돌아왔습니다.

290쪽짜리 동화가 던지는 자유의 질문
이 책은 그림책이라는 분류가 무색하게 290쪽에 달하는 이야기 소설에 가깝습니다.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공원에서 사는 개 요한네스입니다. 요한네스는 공원의 '눈(The Eyes)'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눈'이란 공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관찰하고 원로 들소 세 마리에게 보고하는 정찰자 역할을 의미합니다. 요한네스는 빛보다도 빠르다고 주장하며, 주변 동물들이 그의 달리는 모습을 볼 수조차 없다고 자신합니다.
저는 이 요한네스가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그의 자기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었거든요. 빛처럼 달린다, 아무도 나를 못 본다, 나는 지구를 끌어당긴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오직 속도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읽는 내내 '아, 나도 저랬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속도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삶을 살아왔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책에서 더 중요하게 다가온 건 우화적 알레고리(allegorical narrative)의 구조입니다. 우화적 알레고리란 동물이나 사물에 인간의 속성을 부여하여 사회적·도덕적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서사 방식입니다. 데이브 에거스는 이 형식을 빌려 자유, 연대, 정체성 같은 묵직한 주제를 어린 독자와 성인 독자 모두에게 동시에 전달합니다. 독자가 어느 나이에 읽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층위가 달라지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영리한 지점입니다.
일러스트도 인상적입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친 전통 회화 기법, 즉 고전적 사실주의(classical realism) 풍경화에 요한네스를 합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전적 사실주의란 빛과 원근법을 충실히 재현하는 서양 전통 회화 양식을 말합니다. 일러스트레이터 존 해리스가 그 풍경화 안에 요한네스를 삽입한 덕분에, 시각적으로도 이 책이 말하는 '시대를 초월한 자유의 감각'이 느껴집니다.
이 책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목줄을 안 차는 문제가 아닙니다. 요한네스는 어느 날 자신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어온 그 공원이 사실은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섬이고, 바다 건너에는 메인랜드(mainland)라는 훨씬 넓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서 온 염소 떼를 통해 알게 됩니다. 제가 직접 읽으면서 이 장면에서 가장 오래 멈췄습니다. 내가 전부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아주 좁은 경계 안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 그 감각이 예상보다 훨씬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이 책에서 요한네스가 내면화하는 자유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반려견처럼 주어진 음식과 목줄의 안정을 포기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하는 삶
- 자신이 세계 전부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더 넓은 지형을 인식하는 것
- 혼자 뛰는 속도가 아닌, 함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연대의 힘
코다가 불편하면서도 잊히지 않는 이유
이 책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들소 구출 작전이 아니라 '코다(Coda)'였습니다. 코다란 갈매기들이 더 이상 날 수 없게 될 때 치르는 마지막 의례입니다. 병들거나 다쳐서 비행 능력을 잃기 직전, 갈매기는 날짜와 장소를 정해 마지막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른 뒤 모든 것을 놓아버립니다. 중력에 몸을 맡겨 수면 위로 떨어지는 것,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입니다.
요한네스의 친구 버트런드는 이 장면을 보며 "정말 아름다워"라고 말합니다. 요한네스는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날지 못하면 걸으면 되고, 먹이를 찾고 대화하며 삶을 이어갈 수 있는데 왜 그것이 끝이어야 하냐고 묻습니다. 저는 처음엔 요한네스 편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저도 실패나 능력 상실을 지나치게 '무능의 표식'으로 여겨왔거든요. 코다를 낭만화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두 시각 모두 틀리지 않았습니다. 코다를 명예롭다고 여기는 갈매기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능력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일종의 서사적 일관성(narrative coherence)을 지키는 행위입니다. 서사적 일관성이란 자신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는 감각입니다. 반면 요한네스의 반박은 삶의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존재 자체는 이어질 수 있다는 생존 윤리에 가깝습니다.
어떤 분들은 코다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상징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죽음 방식에 대한 논의에서도 자기결정권(autonomy)이 핵심 쟁점입니다. 여기서 자기결정권이란 개인이 자신의 신체와 삶의 마지막 방식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의료 현장에서도 이 개념은 오래된 논쟁입니다(출처: 국가생명윤리정책원). 반면 요한네스의 입장처럼 삶의 형태가 바뀐다고 해서 삶을 멈출 이유는 없다는 시각도 충분히 타당합니다.
저는 이 장면 이후로 제가 '쓸모없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제가 직접 읽고 느낀 건, 코다에 공감하든 반대하든 이 장면은 독자에게 죽음과 능력 상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스스로 묻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게 이 책이 290쪽짜리 동화임에도 성인 독자에게 묵직하게 남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문학 치료(bibliotherapy) 관점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의미 있습니다. 문학 치료란 독서를 통해 독자가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을 돌아보고 심리적 통찰을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우화적 서사를 활용한 독서는 추상적 감정을 안전하게 탐색하는 데 효과적입니다(출처: 한국독서치료학회).
결국 이 책은 저에게 두 가지를 남겼습니다. 하나는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두 질문 모두 답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갖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라고 미뤄두셨다면, 지금 읽어보셔도 늦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