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읽고 나서 저는 한동안 빌 펄롱이라는 인물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석탄을 나르며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가 부조리 앞에서 '아니요'라고 말하던 순간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결을 가진 작품이라는 소개를 따라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을 집어 들었는데, 읽는 동안 마음이 묘하게 갈라졌습니다. 로버트 그레이니어라는 주인공은 펄롱과 달리 운명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조용히 침묵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미국 산업화 시기를 배경으로, 이름 없는 한 노동자의 일생을 담담하게 따라가면서 우리가 '서부 개척'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온 역사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서부개척 신화 뒤에 숨겨진 노동의 풍경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산업화'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은 개인의 삶을 지워버리는지 실감했습니다.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어린 시절 고아로 기차를 타고 아이다호의 숲으로 보내진 뒤, 평생을 철도 노동자와 벌목공으로 살아갑니다. 소설 초반부에는 협곡을 가로지르는 철도 다리 건설 장면이 나오는데, 남자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그레이니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픈 기분을 느낍니다. 여기서 '11마일 지름길 다리'란 협곡을 우회하던 기존 철로를 대체하기 위해 60피트 깊이의 협곡에 112피트 길이로 건설된 구조물을 의미합니다. 이 다리 하나로 철도 회사는 11마일의 유지보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지만, 그 환호 속에는 정작 이를 만든 노동자들의 감정은 없었습니다.
소설은 증기 엔진을 사용한 목재 운반 장면도 상세히 묘사합니다. 당시 사용된 '당나귀(Donkey Engine)'란 거대한 무쇠 드럼통 두 개로 구성된 증기 엔진으로, 한쪽은 케이블을 풀어내고 다른 한쪽은 감아들이면서 통나무를 끌어가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쉽게 말해 오늘날의 크레인과 비슷한 역할을 했지만, 증기와 기계 소리가 너무 커서 말들의 소리조차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진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현장의 소음과 고통을 덮어버리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1900년대 초 미국 서부 개척 시기에는 약 25만 명의 철도 노동자가 투입되었고, 이 중 상당수가 중국계 이민자와 아일랜드계 노동자였습니다(출처: 미국 노동통계국). 소설에서도 중국인 노동자가 인종 차별을 겪는 장면이 짧게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한 배경 묘사가 아니라 당시 산업화가 특정 집단의 희생 위에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서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카우보이와 금광 발견의 화려함 뒤에는, 이처럼 이름 없이 땅을 파고 나무를 베고 철로를 깔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산업화노동자의 삶과 재난 앞의 침묵
그레이니어는 글래디스라는 여성과 결혼하고 딸 케이트를 낳으며 가난하지만 평범한 행복을 누립니다. 하지만 1920년, 그가 38살 때 거대한 산불이 그의 집과 마을 전체를 집어삼킵니다. 그는 아내와 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불타버린 집터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살아갑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책을 잠시 덮었습니다. 현실감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산불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인재(人災)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벌목과 철도 건설로 인해 숲의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대형 산불의 위험이 급증했고, 1910년 '빅번(Big Burn)'으로 불린 대형 산불은 약 300만 에이커를 태웠습니다(출처: 미국 산림청).
이후 소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개됩니다. 그레이니어는 늑대와 함께 사는 소녀를 보고 혹시 자신의 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고, 꿈속에서 아내 글래디스의 환영을 마주합니다. 여기서 '환영(幻影, Apparition)'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깊은 슬픔이나 트라우마 이후 나타나는 일종의 보호 기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 글래디스의 환영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그레이니어가 느끼는 고독과 그리움이 형상화된 것으로 읽힙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레이니어가 꿈에서 기차를 자주 본다는 대목입니다. 그는 석탄 연기 냄새를 맡으며 기차에 타고 있다가, 어느 순간 세상 속에 남겨지고 기차 소리는 점점 멀어집니다. 이 장면은 그가 어린 시절 고아로 기차를 타고 왔던 기억과 연결되면서, 그의 삶 전체가 마치 한 편의 '기차의 꿈'처럼 덧없고 모호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개인의 삶이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지 떠올렸습니다.
그는 이후 1960년대까지 살아남으면서 라디오의 보급, 비행기의 등장,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같은 시대의 변화를 목격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여전히 숲 속 오두막에서 개와 함께 지내며 사람들과 거리를 둡니다. 1968년 그는 극장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데, 소설은 기차의 경적 소리와 늑대의 울음 같은 원초적인 소리로 끝을 맺습니다. 이는 그레이니어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환상과현실이 뒤섞인 서술과 그 의미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환상과 현실이 혼합된 서술 방식입니다. 늑대 소녀, 글래디스의 환영, 반복되는 기차의 꿈 같은 장면들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그레이니어의 내면을 형상화한 장치입니다. 저는 이 방식이 오히려 더 사실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깊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의 현실은 종종 환영처럼 흐릿하고, 환영은 때로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특히 글래디스의 환영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딸을 찾지 못해 슬퍼하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반복적으로 재현합니다. 그녀는 산불을 피해 도망치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허리가 부러지고, 딸만은 살리기 위해 보디스의 매듭을 풀어주지만 자신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갑니다. 이 장면은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이는 그레이니어의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결과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슬픔이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설은 중편이라는 형식 때문에 2012년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지만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장편 소설이 갖는 깊이나 무게감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짧은 분량이 소설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설명 없이 한 인간의 일생을 담담하게 따라가면서, 독자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편 소설(Novella)이란 일반적으로 2만~5만 단어 분량의 서사물을 의미하며, 단편보다는 깊이 있지만 장편보다는 압축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이 형식은 특정 순간이나 인물의 변화에 집중하기에 적합합니다.
이 소설이 남긴 가장 큰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역사는 영웅이 아니라 이름 없는 노동과 상실로 구성된다
-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압도적 힘이다
- 재난 앞에서 침묵하는 삶도 현실의 대부분이며, 이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저는 이 점이 불편하면서도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는 행동하는 인간만을 '의미 있는 사람'으로 기리지만, 실제로는 그레이니어처럼 재난을 견디고 살아남는 사람들이 역사의 대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은 '큰소리' 없이 끝까지 밀어붙인 단단한 사실을 남깁니다. 서부 개척이라는 화려한 신화 뒤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피땀이 있었고, 산업화는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레이니어의 삶은 영웅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기차의 꿈'이라는 제목이 단순히 꿈속의 기차가 아니라, 한 시대를 관통한 개인의 삶 자체가 덧없는 꿈처럼 흘러갔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토록 사소한 것들』에 감동받으셨다면, 이 소설도 여러분의 마음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