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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꿈 (서부개척 신화, 고독과 침묵, 실존적 수용)

by haramsolution 2026. 4. 21.

퓰리처상 심사위원단이 "당선작 없음"을 선언하면서도 가장 아깝다고 꼽은 소설이 있습니다. 데니스 존슨의 『기차의 꿈』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덮지 못했습니다. 빌 펄롱이 문을 열고 나간 소설이 있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차의 꿈
기차의 꿈

서부개척 신화 뒤에 숨겨진 이름 없는 노동자들

일반적으로 미국 서부 개척이라고 하면 카우보이, 금광 발견, 역경을 뚫고 성공하는 개인의 서사를 먼저 떠올립니다. 서부극(Western)이라는 장르 자체가 그 신화를 재생산해왔고, 저 역시 오랫동안 그 이미지로 서부 개척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을 직접 읽어보니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초 급격히 산업화되던 미국입니다.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고아로 태어나 아이다호의 숲으로 보내진 뒤 평생을 철도 노동자와 벌목 노동자로 살아갑니다. 협곡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고, 당나귀(Donkey Engine)라 불리는 증기 기관으로 통나무를 끌어올리는 일이 그의 하루입니다. 여기서 Donkey Engine이란 산림 벌목 현장에서 케이블을 감고 풀면서 통나무를 이동시키는 소형 증기 기관을 뜻합니다. 당시 미국 서부 개척의 핵심 장비였지만, 정작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았습니다.

소설이 묵묵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웅장한 루빈슨 협곡 다리(깊이 208피트, 폭 804피트)가 완성되던 날, 그레이니어는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슬픔을 느낍니다. 소설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오히려 더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화려한 성취 뒤에는 항상 설명되지 않은 감정들이 있으니까요.

미국 문학에서 이처럼 노동 계급의 일상을 리얼리즘(Realism) 기법으로 그리는 전통은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리얼리즘이란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문학적 방법론입니다. 데니스 존슨은 여기에 환상과 신화적 요소를 섞어, 단순한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냈습니다.

고독과 침묵, 그리고 운명을 수용하는 방식

『이토록 사소한 것들』의 빌 펄롱과 『기차의 꿈』의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묘하게 닮은 인물입니다. 둘 다 말이 없고 성실하며, 이름 없는 노동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두 사람의 방향은 완전히 갈립니다.

펄롱이 부조리한 세계 앞에서 "아니요"라고 말하고 문을 열고 나간다면, 그레이니어는 1920년 38살에 산불로 아내 글래디스와 딸 케이트를 한꺼번에 잃은 뒤 문을 닫습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로. 그는 불타버린 집터에 오두막을 짓고, 거기서 혼자 살아갑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너지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오래 생각했습니다.

소설은 이후 실존적 수용(Existential Acceptance)의 서사로 이어집니다. 실존적 수용이란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상실을 거부하거나 싸우는 대신, 그것을 자신의 존재 안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레이니어의 삶은 바로 이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꿈에서 글래디스의 환영을 만나고, 늑대와 함께 나타난 소녀를 보며 잃어버린 케이트를 떠올리는 장면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 없이 펼쳐집니다.

일반적으로 환상적 서사는 현실 도피의 장치로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레이니어의 환영들은 그의 슬픔과 그리움이 형상화된 것으로, 오히려 그가 얼마나 깊이 상실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마술적 리얼리즘(Magical Realism)이라는 기법이 여기서 힘을 발휘합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현실적인 배경 위에 초자연적이거나 환상적인 요소를 자연스럽게 섞어 넣는 서사 기법으로,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특히 발전했습니다.

그레이니어가 이 침묵과 고독을 감내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저에게 개인의 회복력에 대한 과도한 낙관이 아니라 그 반대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과연 이 침묵은 내면의 평화인가, 아니면 구조가 강요한 체념인가.

실존적 수용의 빛과 그림자,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가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분명합니다. 그레이니어는 1960년대까지 살아남아 라디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듣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직접 목격하며, 극장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기차의 경적과 늑대의 울음소리가 뒤섞이는 마지막 장면은 그가 자연으로 돌아갔음을 알립니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스며드는 소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읽는 내내 감동받으면서도 불편한 감각이 남았습니다. 그레이니어 곁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인종 차별을 당하는 장면이 지나가는 방식, 그리고 그레이니어가 그것을 목격하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 소설은 그것을 비판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갑니다.

저는 여기서 '실존적 수용'의 한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제가 블로그를 쓰면서 느끼는 조급함, "더 써야 한다, 더 빨리 가야 한다"는 내면의 자동 재생 테이프를 잠시 멈추고 지켜보는 연습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요함이 불안을 팔아 성장하는 플랫폼 구조나 SNS의 비교 알고리즘 문제를 가려버리는 방향으로 흐르면 안 된다는 것도 동시에 느낍니다.

그레이니어의 침묵을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으로만 읽는 것과, 그 침묵이 구조적 고통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붙드는 것. 이 소설이 요구하는 독해 방식이 바로 그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서부 개척 신화(Western Frontier Myth)의 이면: 화려한 성취 뒤에 지워진 노동자들의 삶
  •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한 내면 형상화: 환상이 주인공의 감정을 대신 말한다
  • 실존적 수용의 이중성: 아름다운 체념인가, 구조적 체념인가

미국 문학 연구자들은 데니스 존슨의 작품에서 이러한 노동 계급 서사와 초자연적 요소의 결합이 독특한 미국적 실존주의를 만들어낸다고 평가합니다(출처: 미국문학협회(MLA)). 또한 퓰리처상 소설 부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편 소설이 수상한 사례가 극히 드문데, 이는 장르 편향(Genre Bias) 문제로 꾸준히 논의되고 있습니다(출처: 퓰리처상 위원회).


『기차의 꿈』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소설이 정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레이니어처럼 살아야 한다고도 하지 않고, 펄롱처럼 살아야 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침묵과 행동 사이 어딘가에 실제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은 뒤 고요함을 개인 처방으로만 두지 않겠다는 생각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고요는 더 정확히 싸울 지점을 고르기 위한 준비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읽고 감동받으셨다면, 이 소설은 그 감동의 다른 면을 오래 건드릴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2MHg1VaF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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